은교- 삶의 열정을 되찾은 ‘넛지효과’
노(老)시인 이적요는 교과서에 자신의 시 ‘동백꽃’이 실린 국민 시인이다. 어느 햇살 따뜻한 날 뽀얀 피부에 살짝 마른 18세 여고생 은교가 나타난다. 70대 국민 시인은 어느새 18세 소녀에게 빠진다. 누가 그랬다. 그 나이대라면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고. 시인은 소설을 쓴다. ‘은교’.
정지우 감독의 영화 <은교>는 개봉 전부터 입소문을 탔다.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부적절한 이야기가 소재라는 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정 감독은 전력이 있다. 전작인 <해피엔드>(1999)는 부적절한 소재에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영상이 압권이었다.
흔히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고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3자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삐딱하게 본다. 사회통념이라는 합리적인 이유가 뒤에 깔려있다. 스승을 은교에게 빼앗긴 제자 서지우는 둘의 사랑을 ‘더럽다’고 말한다.
감독이 뽑은 최고의 명대사는 ‘별이 똑같은 별이 아니다’다. 이적요(박해일 분)의 대사다. 사물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제자 서지우(김무열 분)는 그 온전한 뜻을 이해 못한다. 그냥 별은 별일 뿐이다. 이적요는 은교(김고은 분)가 나타나면서 생의 활력을 되찾고 삶의 기쁨을 되찾는다. 그리고 이상문학상을 받게 되는 소설 ‘은교’를 빚어낸다.
노시인의 행동을 바꾼 은교는 ‘넛지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넛지란 강요가 아닌 부드러운 개입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넛지(Nudge)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는 뜻이다. 면전에서 말하거나 요구하는 대신 그저 팔꿈치로 툭 치는 것만으로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밥을 잘 안먹는 아이에게 밥을 많이 먹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먹도록 하면 된다. 굳이 밥을 많이 먹으라며 달래거나 야단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누군가와 식사를 하면 혼자 먹을 때보다 35% 이상, 네 명이 함께하면 75% 이상 더 먹는다.
금연인구가 늘었다는 뉴스는 금연율을 높이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뉴스는 자살률을 높이기도 한다. 누가 담배를 끊으라고, 자살을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한다. 이게 넛지다. 의사가 수술해서 살아날 확률이 90%라고 말할 때와 죽을 확률이 10%라고 말할 때도 환자의 선택은 달라진다. 후자의 경우는 수술 거부율이 높다. 넛지는 작은 영향(개입)을 미쳐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라고 부른다.
은교의 등장은 이적요의 삶을 바꾼다. 생의 활기를 되찾고 심장을 콩닥콩닥 뛰게 만든다. 결국은 이상문학상을 받는 소설까지 쓰게 한다. 이 모든 것을 은교가 강요하거나 시킨 것이 아니다. 은교가 한 것은 노시인 집의 청소와 설거지뿐이다. 행동이 달라질지 아닐지는 이적요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넛지효과는 선거에도 적용될 수 있다. “내일 투표하실 거냐”는 질문 자체로 투표율이 높아질 수 있다. 인증샷 놀이도 마찬가지다. 인증샷이 곧바로 투표율을 높이지는 않지만 분명 사람들이 투표장을 더 찾게 하는 유인이 된다. 선거마감 2시간 전 방송사들이 투표율을 공개하는 것도 같은 의미다. 투표율이 너무 낮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투표장으로 찾아간다.
노시인은 말한다. “너희의 젊음이 노력해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이 대사를 듣고 ‘아차’ 싶어 오늘부터 더 사랑하고 더 즐겁게 살겠다고 다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넛지효과다.
< 박병률 경향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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