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0월 28일 밤. 서울 마포구의 어느 선교회.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텔레비전 중계 카메라는 교회의 지붕과 그 위쪽 칠흑 같은 밤하늘을 오르내렸습니다.
이제 잠시 후 자정이 되면 세계의 종말이 오고 이 선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저 하늘 위 어디론가로 들려 올려질 것이라는 믿음.
그렇습니다. 20세기의 막바지. 이른바 세기말적 현상 중의 하나였던 종말론과 그에 편승했던 '휴거'론에 대한 얘기입니다.
물론 그날 밤 세상은 멀쩡했습니다. 자살한 사람, 직장을 떠난 사람, 가출한 사람, 이혼한 사람 등등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었던 '휴거론'은 곧바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요.
그리고 24년이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휴거는 또다시 등장해 그 또한 조롱의 대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한 임대아파트 이름의 앞 글자 휴와 거지의 거 자를 합쳐서 휴거…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이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을 놀릴 때 쓰는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약육강식만이 지배하는 천민적 자본주의의 학습은 놀림을 당하는 아이들이나 놀리는 아이들이나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는 나의 아들은 엘리트로 성장할 것이다"
작가 강영민의 설치 작품 '가위눌림'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작가는 이른바 헬조선의 민낯을 그렇게 표현했나 봅니다.
결국 잘못된 가위눌림이 아이들에게까지 투영돼 '휴거'란 말을 만들어낸 건 아닐지요.
마음이 무거우실 분들을 위해 오늘은 영화 얘기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피자집을 하던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무슨 이유인지 살던 집에서도 쫓겨난 주인공 지소는 부동산 업소에 붙은 글귀 하나를 발견합니다.
'평당 500만원' 분당 옆 평당, 그곳에 500만원이면 집을 살 수 있다… 소녀는 부잣집 개를 훔친 뒤 보상금을 받아 집을 마련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웁니다.
물론 계획이 성공했을 리는 없지요. 결말은 착한 할머니가 터무니없이 싸게 내놓은 500만원짜리 전셋집에 들어가 살게 된다는 얘기…
이를테면 아이들은 세상의 종말에서 할머니의 집으로 휴거를 한 셈이지요.
이것은 1992년의 휴거도 아니고, 2016년의 휴거도 아닌 진정한… 사람 사는 세상의 휴거…
단지… 영화라는 것만 빼놓고는 말입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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