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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앵커브리핑중 '세손을 위해 세초했지만…'

eros 2017. 7. 19. 23:00



유숙세검정도(劉淑筆洗劒亭圖)


경복궁 뒤편에 있는 세검정은 이름 그대로 인조반정 때 칼을 씻은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조선시대 '세초'가 행해졌던 곳입니다.

세초(洗草)란 사관이 먹으로 한지에 써온 기록, 즉 사초를 지우는 일을 말합니다.



왕이 승하하면 사관들은 그동안 기록해온 사초를 바탕으로 실록을 완성하는데 실록이 완성되면 그 자료들을 모두 물에 씻어서 흘려보냈다고 합니다.

물론 조금 이례적인 일도 있긴 했습니다. 1776년 영조임금이 승정원일기 1년 치를 세초한 것이죠. 그 안에는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록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록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세손을 위해… 세초했다"





기록은 물로 없앴지만 기록을 없앴다는 사실이라도 기록해서 후대에 남겼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래서 인간이 함부로 지워낼 수 없는 두렵고도 두려운 무언가가 아닐까.

자료를 지워서 기억마저도 지워버리고 싶은 그 욕구들은 기록의 형태가 컴퓨터로 옮겨간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지난 2006년에 출간된 소설 < 빛의 제국 > 작가 김영하는 귀환명령을 받은 남파간첩이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삭제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에 잠기자 하드디스크의 내부에서 물방울들이 보글보글 올라왔다…고작 몇 방울의 물거품이라니" (김영하/빛의 제국 )

공교롭게도 여기에도 물이 등장하는군요.

그리고 지금은 원하기만 한다면 자기장을 이용해서 문서의 흔적을 지울 수 있는 시대.


디가우징(Degaussing)은 자기장으로 하드디스크를 물리적으로 복구 불가능하게 지우는 과정이다. '디가우서(Degausser)'라는 장비에 하드디스크를 넣어서 이 장비를 작동시키면 하드디스크의 저장 장치와 플래터가 망가져 모든 기록이 복구 불능의 상태...


그러나 우리는 흔적도 없이 봉인됐거나 지워져버린 것으로 알았던 수많은 자료들과 오늘도 대면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우려 지우려 해도 더욱 선명해지는 그 모든 것들.

캐비닛 속에 기록을 남겨두었던 누군가 역시 그 옛날 영조 시절, 왕명을 받들어 승정원일기를 지우면서도…지웠다는 기록만이라도 남겨두고자 했던 그 사관의 심정이었을까…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