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인 우주비행사 쿠퍼는 딸의 이름을 '머피'라고 지었습니다.
불운이 연거푸 일어난다는 머피의 법칙. 그래서 아이는 늘 이름에 불만이었습니다. 시무룩해진 머피에게 아버지는 말합니다.
"머피의 법칙은 나쁜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말이란다"
오늘(29일)은 올해의 마지막 앵커브리핑을 전해드리는 날입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힘든 시간들이었지요.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을 모두는 함께 겪어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쿠퍼의 그 말처럼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나게 돼 있던 것이 아닌가…
세상은 잠시 멈춰 섰을 뿐. 2016년의 대한민국은 이미 한참 전에 극복해야 했을 그 어두운 과거들을 이제서야 청산하고, 잃어버린 것을 되살려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는 것.
그대신 모두는 '함께'라는 마음과 스스로 세상을 바꿔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무엇보다도 '시민의 품격'을 얻게 되었다는 것.
시민 모두의 마음이 다 같을 수는 없어서 촛불에 대한 비난과 비아냥도 여전하지만, 또한 흐름을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 또한 계속되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불운의 법칙인 머피의 법칙이 역사 앞에선 반드시 일어났어야 할 당위의 법칙이 된 지금…
모두가 힘들게 버텨냈어야 했을, 그러나 반드시 일어났어야 했을 2016년의 그 많은 일들을 겪어낸 시민들께 이런 위로를 전합니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어두운 밤을 함께 걸어갈 수많은 마음들과 함께 새해, 새 날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세월호 가족 여러분께, 그 세월호를 겪었던 2014년의 마지막 앵커브리핑에서 소개해드렸던 멀리 아일랜드 켈트족의 기도문을 다시 한 번 전해드립니다.
"바람은 언제나 당신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항상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길…"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그림은 직접 그린 화가를 통해서 설명을 들으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게 된다.
시 또한 작가에게 직접 듣게 되면 어떻게 될까?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단어까지 보이게 된다.
이 시에 대한 해설은 작가의 산문집 <길귀신의 노래>에 아주 자세히 실려 있다.
스무 살의 겨울에 처음 쓰이기 시작해 스물한 살의 가을에 '사평역에서'라는 제목을 얻었으며 스물여덟 살의 겨울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 바로 <사평역에서>라는 시이다.
당시 시의 인기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작가가 소개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어서 소개한다.
소설가 김훈 작가가 문화부 기자시절 <사평역에서>를 취재하기 위해서 화순의 사평에 들렀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묻고 나서야 <사평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작가에게 전화하기를
"사평에 갔더니 역은 없고 빈 들판에 눈발만 날리더구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어.역이 없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 그런데 역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점점 더 좋아지더구먼. 바바리코트에 넣어 간 막걸리 두 병 혼자 마시고 돌아왔지."
그렇게 돌아온 김훈 작가가 답사기에 쓴 첫 문장은
'사평은 어디에도 없고 우리들 마음 어디에도 있다' 였다.
- 길귀신의 노래, 94쪽
70년대의 암울한 시대는 흐르고 흘러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다리는 막차는 오지 않고 있는 현실은 그대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침울해 할 이유 또한 없다.
사평역은 지금도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누구에게나 존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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