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20일 수요일, 주요 6대 조간 신문사설
2006년 9월 20일 수요일, 주요 6대 조간 신문사설
[한국일보] 대통령과 전 내정자가 헌재문제 풀어야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내정자의 임명절차가 한 달 넘도록 표류하게 됐다. 19일에도 국회 본회의 임명동의안 상정이 이뤄지지 못한 만큼 추석 이후에나 논의가 가능해졌다. 헌재소장은 회의와 재판에서 특별히 우월한 역할을 하는 자리가 아니며, 법에 따라 선임되는 권한대행도 있는 데다, 재판관 7인 이상이면 회의와 재판에 별 문제는 없다. 그렇다 해도 제4부에 해당하는 중요한 헌법기관장의 궐위가 장기화하는 상황은 딱하다.
당초 전 내정자에 대한 야당의 거부감으로, 즉 정치적 동기로 문제가 촉발된 것이라는 지적은 일정 부분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시발이 어떻든 애초부터 어정쩡한 정치적 타협으로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모든 법률에 대해 최종적으로 헌법적 판단을 가리는 기관의 장에 대한 임명절차가 위법성을 띠고 있다는 게 문제의 본질이었다.
원천적으로 위법소지를 없애는 법률적 접근방식으로 다뤄졌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법의 편의적 유추해석을 통해 국회 임명동의가 이뤄진다면 헌재의 권위와 신뢰성 추락 등 심각한 후유증이 이어질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무리한 정치적 절충 시도는 부작용을 남길 뿐이다.
결국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사람은 인사권자와 당사자밖에 없다. 청와대도 절차상 하자를 인정한 만큼 노무현 대통령은 더 이상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지명을 철회하는 것이 옳다. 그것은 이념과 철학을 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소 그토록 강조해 온 원칙에 충실하는 길이다.
무엇보다 이런 파행 속에서도 전 내정자가 아무런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는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대통령이나 여당의 정치력에 기대 사태의 호전을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는 독립적 헌법기관의 수장으로서의 자질을 더욱 회의하게 만들 뿐이다.
지금으로선 헌재소장 내정을 원점으로 돌리고 다시 정확히 적법절차를 밟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더 이상 논란의 소지가 없도록 관련법을 개정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한겨레신문] 영원한 기자 리영희의 비판
정신, 면면히 이어져야
‘영원한 기자’ 리영희 선생은 1964년 〈조선일보〉 근무 중 필화로 구속된 뒤 89년 〈한겨레〉 방북취재 계획으로 구속되기까지 아홉번
연행돼 다섯번 구속당했다. 69년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뒤 모두 네차례(언론사 2번, 대학 2번) 직장에서 쫓겨났다.
이 가시밭길을
걸으며 그는 기자 혹은 학자로서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했다. 거짓의 우상을 깨고자 했다. 그 결과 베트남전쟁의 은폐된 진실, 미국 패권주의의
추악한 모습, 정권의 위선과 부패의 실상이 드러났다. 그에게 진실은 모두가 나누어야 할 생명이었다. 때문에 밝혀진 진실은 글로 옮겨졌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이었다. 저작이 나올 때마다 구속이나 연행을 감수해야 했다. 선생의 글은
거짓에 중독된 이성을 깨웠고, 권력에 짓눌린 지성을 일으켜세웠다. 고난받는 이들에겐 어둠속의 한 줄기 빛이었고, 권력자에겐 정수리를 후비는
비수였다.
후학들이 선생의 저작을 모아 엊그제 〈리영희 저작집〉 발간기념회를 열었다. 비판적 지성인의 저작이 생전에 전집으로 출간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든 일이나, 선생이 걸어온 길, 선생의 글이 세상을 밝게 비췄던 것을 생각하면 결코 이르다 할 수 없다. 그러나 선생이 이를 계기로 절필의 뜻을 밝혔다니, 가슴이 서늘하다. 한 시대의 막이 이렇게 내리는가.
선생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했던 주장은 이제 상식이 되었으니, 내 글의 소임은 다 한 것 같다. 사상가는 자신의 생각이 사회에서 수용되고 실현되면, 기꺼이 뒤로 물러나야 한다.” 엄정한 진퇴가 후학의 자세를 다잡게 한다. 그러나 선생이 말한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한때 우상 앞에서 나팔 불고 춤 추던 무리들이 선생을 진보 지식인의 대부라고 추어세우는 척한다고 하여 우리 사회가 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들은 ‘냉전 수구’의 본질을 보수로 포장하여, 우리 사회에서 진실의 한 담지자로 행세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지금도 전시 작전통제권과 북한 핵·미사일 따위를 들먹이며, 우리 사회를 냉전의 동굴 속으로 디밀고 있다. 게다가 우상의 정체를 드러낼 양심세력은 날로 쇠잔해지고 있다. 지금은 등불을 끌 때가 아니다. 오히려 높이 올려야 한다. 이제 누가 올려야 하나.
[동아일보] 新노동연합, 좌파 노동운동의 흐름 돌려 놓길
1980년대 후반 민주화 분위기를 타고 총파업을 주도했던 노조 간부들이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을 창립한다. 이를 통해 이들은 과격한 투쟁을 견제하고 일자리 창출에 앞장서는 새로운 노동운동에 나선다. 권용목 뉴라이트 신노동연합 상임 대표는 강성 노동운동을 벌이다가 4차례 투옥됐고, 1995년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을 맡은 인물이다. 주사파가 침투한 노동계에 환멸을 느끼고 1996년 현장을 떠났던 그가 10년 만에 뉴라이트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은 노사 대립의 전투적 조합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평가할 만하다.
권 대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노동운동에 주체사상이 침투했고 지금도 NL(민족해방)과 PD(민중주의)의 이념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고 증언한다. 폭력적이고 반(反)기업적인 노동운동의 뿌리를 알게 해 주는 얘기다. 1980년대 한때 대학과 노동계엔 좌파적 운동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러나 정치 민주화가 이뤄지고 동유럽과 소련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된 뒤에도 기업이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극좌파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의 노사관계는 60여 평가대상국 가운데 4년 연속 꼴찌다. 해외 투자설명회에 참여해 온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외국인 투자가들이 한국을 투자대상 1순위로 보면서도 노사관계 때문에 중국과 대만을 검토 중이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노조의 강성 투쟁으로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면 기업들은 해외로 옮겨 가고 국내에선 일자리가 줄어든다.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이 창립 선언문에서 ‘실업의 악순환이 만연한 현실 앞에서 국민의 외면으로 구시대의 노동운동은 막을 내렸다’고 선언한 것은 민심과 시대의 요구를 바로 읽은 것이다. 민주노총의 전투적 조합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온건한 순수 노동운동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조선일보] 外大, ‘무노동 무임금’ 원칙 지켜 장학금
만든다
한국외국어대가 19일로 167일째 파업을 하고 있는 직원노조에 임금을 주지 않고 그 돈을 장학금과 도서관 신축비용 등으로 쓰겠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쌓인 노조원들의 임금 40여억원 중 25억원으로 장학기금을 만들어 불우학생들의 등록금 대출 이자를 대신 내줄 계획이라고 한다. 나머지 15억원으로는 도서관에 無人무인도서반납기를 설치하고 내년 초 5층짜리 도서관을 새로 짓는 데 보탤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無무노동 無무임금’ 원칙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공개 선언한 것이다. 이 학교 학생들도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노조에 위자료 청구소송을 내기로 하고 벌써 1000명 이상이 서명했다고 한다.
상쾌한 소식이다. 지금 외국어대는 직원노조 파업 이후 모든 것이 엉망이다. 도서관에는 책들이 정리가 안 돼 서가마다 널려 있고, 올여름 일부 강의실은 냉방이 안 돼 문을 열어 놓고 수업하는 바람에 주변 공사장 소음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예정됐던 취업설명회도 열리지 못하고, 1학기에 교환학생으로 온 일부 외국학생들은 생활비 지원을 받지 못해 분통을 터뜨리며 돌아가 버렸다. 학교측으로서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것이 큰 부담일 것이다. 외국어대는 이 부담을 무릅쓰고서까지 ‘무노동 무임금’을 固守고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노조의 단체행동이 법으로 보호받는 근로자의 권리라면 파업기간 중에 임금을 주지 않는 것도 법에 明示명시돼 있는 使用者사용자의 권리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당연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거의 없다.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면 처음엔 ‘무노동 무임금’을 외치다가도 파업이 끝나면 격려금이다 뭐다 갖은 구실을 붙여 못 준 임금을 뒤로 찔러주곤 했던 것이 우리의 노사 慣行관행이었다.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을 비롯한 수많은 사업장에서 연례행사처럼 파업이 벌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면 할수록 得득인 파업을 어느 노조가 마다하겠는가.
외국어대의 ‘원칙 지키기’가 그래서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중앙일보] 정상회담 정부 발표 과연 믿을 수
있나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놓고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같은 사안을 놓고 한.미의 설명이 정반대다.
심지어 청와대와 외교부 간의 설명도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이 정권의 외교안보 능력이 어떤 수준이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이번처럼 어처구니없는 소동을 보면 실망을 넘어 환멸을 느낀다. 명색이 '정부'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기초적 기능마저 실종됐기 때문이다.
우선 북한에 대한 제재를 놓고 한.미 간에 어떤 논의가 있었느냐는 대목에서다. 주미 대사관의 고위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재무장관에게 마카오 소재 BDA은행에 대한 미국의 조사 종료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너무 지체되면 6자회담 재개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청와대 대변인은 이를 부인했다. "미국의 법 집행과 6자회담 재개 노력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지, 종결 요청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설명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병폐는 이런 혼선이 어떻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느냐는 점이다. 정상회담이 끝나면 본국과 현지 대사관 사이에 사전 조율이 이뤄져 그 결과를 설명하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럼에도 이런 기능은 상실된 채 정상회담 실무 주역인 대사관 고위 관계자의 발언이 나오자마자 청와대가 나서 반박을 한 것이다. 이 정도로 갈팡질팡하는 정부를 어떻게 '정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정상회담이 끝난 지 며칠 만에 한.미 간에 다른 설명이 나오는 것도 어이가 없다. 회담 직후 송민순 청와대 안보실장은 두 정상이 6자회담 재개를 위해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고 밝혔다. 그것도 무슨 대단한 성과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미 국무부 고위 관계자는 "그것은 한국 측이 고안해 낸 말"이라며 "용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안을 한.미가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두 정상이 그런 용어에도 합의한 바 없으며, 미국은 그런 식의 애매모호한 접근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다. 결국 송 실장이 정상회담 성과를 포장하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이 나라의 외교안보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으니 이번과 같이 국민을 혼란에 빠트리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이번 소동은 이 정부의 외교안보 능력이 이제는 한계점에 왔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능력도 아마추어인 데다, 전시작전통제권 논란에서
보여주듯 오만과 독선이 가장 큰 원인이다. '적당히 설명하면 국민이 넘어가겠지'라고 판단한 것은 아닌지 자문하길 바란다. 한.미 정상회담같이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는 회담이라면 그 실상을 정확하고 소상하게 국민에게 알린다는 것은 공직자의 일차적 의무다. 그래야 국민도 나름대로 판단할
것 아닌가. 더 이상 편법이나 꼼수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 국민이 그렇게 우둔하지 않다.
[경향신문] 분양원가 공개해 거품 빼는 수밖에 없다
서울시와 SH공사가 은평 뉴타운의 고분양가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자 ‘분양원가’라며 일부 분양가 내역을
공개했다. 그런데 ‘분양가와 관련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분양가의 투명성을 알리기 위해 공개했다’는 것이 토지비와 건축비뿐이어서 어떻게 이런 비싼
토지비와 건축비가 산출됐는지를 따질 수 없게 돼 있다. 여론에 밀려 마지못해 일부 숫자만 내놨을 뿐 근본적으로 분양가 산정 과정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겠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판교 신도시보다도 높게 나온 건축비 등 공개한 내역 자체도 100% 신뢰하기 어렵다.
은평 뉴타운의 이번 고분양가 논란은 한마디로 철학이 없는 부동산 정책이 빚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뉴타운 사업의 근본 취지를 망각한 채 민간 아파트 건축업자나 다름 없이 사업을 추진했기 때문에 이 같은 고분양가가 제시된 것이다. 서울시 설명대로 보상비 등이 비싸 분양가가 주변 시세보다 30~40%씩 높게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면 사업 자체를 재고하든지 공정 단계별로 끼어있는 개발이익의 거품을 빼 분양가를 끌어내려야 했다. 주변 시세보다 턱없이 비싼 분양가를 책정할 경우 주변 시세를 끌어올리는 부작용이 나타나 집값 안정이라는 커다란 정책 목표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은 국민상식이기 때문이다. 서울시와 SH공사가 비싼 토지비와 건축비도 모자라 수익률까지 얹은 것을 보면 그런 정책적 고려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비싸면 비싼 대로 보상비 주고, 건축비가 판교보다 비싸게 나와도 이를 그냥 인정해 분양가를 제시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서울시와 SH공사가 공영개발의 취지를 생각했다면 이처럼 재개발로 돈만 벌면 되는 건축업자나 다름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분양원가 공개를 통해 분양가 거품을 제거하지 않는 한 고분양가에 따른 부작용과 투명성 논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고분양가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하루 아침에 총액 6백억원에 이르는 분양가를 인하한 파주 운정 신도시의 사례도 엄청난 분양가 거품의 실재를
방증한다. 부동산 시장은 작은 허점만 나타나도 값이 뛰고 그동안의 안정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서울시가 은평 뉴타운과
같은 식으로 아파트를 비싸게 지어 팔겠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뉴타운 사업 자체에 대한 재검토 여론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