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 앵커브리핑중 '팽형에 처하노라~' 잊어버린 수치심
조선 철종 임금 시절. 한양 우포도청 앞 혜정교 한 가운데에 커다란 가마솥이 걸렸습니다.
'팽형에 처하노라~'
포도대장의 명이 떨어지면 탐관오리로 붙잡혀온 사람이 포박을 당한 채 가마솥에 들어갔습니다.
'팽형' 즉 물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이는 형벌을 받게 된 겁니다. 실로 '엽기적'인 형벌이었지요… 모두가 숨죽이는 순간…
그러나 반전은 있습니다. 가마솥의 물은 그저 미지근했습니다. 실제로 삶아 죽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솥에 들어갔던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인 양 칠성판에 실려 돌아갔고, 장례가 치러지고, 그길로 금치산자가 되었다 합니다.
'수치심'으로 벌하는 것.
"탐관오리 중 심한 자는 팽형에 처한다면 염치를 아는 풍속이 일어나고 백성의 괴로움이 사라질것"
사헌부 장령 최계옹의 상소(숙종29년)
탐관오리에게 사회적인 죽음을 내렸던 조선시대의 팽형은 그렇게… 수탈당해온 백성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들 역시 그 팽형의 수치심을 느꼈을까…
현직 부장판사가 구속되고… 현직 검사장이 구속되고… 또 다른 부장검사가 또다시 특별감찰선상에 오른 사건… 이들이 내세웠던 사회정의보다 결국 돈이 앞선 시대의 민낯…
1억7천만원대 뇌물수수 혐의 김수천 부장판사
9억5천만원대 뇌물수수 혐의 진경준 검사장
스폰서 `사건청탁 의혹 김형준 부장검사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굶어죽는 게 더 영광이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현직 대법원장이 대국민 사과에서 인용한 초대 대법원장의 이 말은 지금 과연 어떤 무게를 갖고 있는가…
그들은 스스로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사실은 국민들로부터 이미 '팽형'… 즉, 신뢰의 죽음을 당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리 위에 커다란 솥이 걸리던 그 시대. 당시의 수치스러움이 한평생 이어질 부끄러움이었다면 지금의 수치스러움은 잠시만 버티면 지나갈 것만 같은, '유효기간'이 설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무엇보다도 무거워야 할 대법원장의 사과 역시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가라앉지 못하고 그저 연기보다 더 가볍게 떠돌고만 있는 오늘…
서울 광화문 인근 옛 한양 우포도청 앞 혜정교는… 이젠 실체도 없이 그 터만 남아 오늘날의 탐관오리들의 잊어버린 수치심과 시민들의 위로받을 길 없는 자존심을 상징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팽형(烹刑)은 고대 형벌 중 하나로, 말 그대로 삶아 죽이는 사형이다. 끓는 물에 처박거나, 불타는 기름가마에 던져서 죽인다. 모사 역이기가 이 형벌로 죽었다.
한국에서의 팽형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 명예형으로 바뀌어 실제적으로 삶아 죽이는 것이 아닌, 그냥 올려만 놓은 가마솥에 해당 죄인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되었다. 팽형을 받은 죄인은 주로 양반이었으며 받고 나서 주변 사람들은 그가 없는 듯 행동하는, 사회적 사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