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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인즈 경제학의 번영과 쇠퇴

eros 2008. 10. 17. 13:55

☞ 케인즈 경제학의 번영과 쇠퇴

“대규모 대부(貸付) 계획을 정부는 후원해야 합니다. 어떤 일에 대부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 기간에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업들, 이를테면.... 철도 사업 같은 분야에 우선권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목적은 일단 경제를 굴러가도록 만드는 데 있으니까요.”

--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J. M. 케인즈--



◆ 고전학파와 케인즈학파가 등장하던 시대에 경제 문제는 무엇이었나?
◆ 케인즈가 진단한 공황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 처방은 어떤 것이었나?
◆ 절약의 역설을 설명하라.
◆ 인플레이션 갭과 디플레이션 갭을 설명하라.
◆ 저축의 크기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 케인즈 이론에서 주장하는 경제 안정화 정책을 설명하라.
◆ 투자의 사회화란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라.
◆ 임금의 하방 경직성과 총공급 곡선의 기울기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 IS 곡선을 유도하라.
◆ LM 곡선을 유도하라.
◆ 총수요 곡선을 유도하라.
◆ 필립스 곡선의 성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 파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무엇을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하는가?
◆ 단순 기대, 적응적 기대, 합리적 기대는 각기 어떻게 다른가?
◆ 총공급 곡선을 유도하라.
◆ 기대 가정에 따라 총공급 곡선의 기울기는 틀려진다고 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라.
◆ 새고전학파의 정책 무용성 주장을 설명하라.
◆ 합리적 기대 혁명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중요 용어)

불황의 경제학 쎄이의 법칙 신축적 가격 경제
고정 가격 경제 유효 수요 절약의 역설
행태 변수 승수 경제 안정화 정책
대 경기 순환 정책 투자의 사회화 임금의 하방 경직성
왈라스의 법칙 IS 곡선 LM 곡선
필립스 곡선 스태그플레이션 단순 기대
적응적 기대 합리적 기대 정책 무용성 주장
케인지안 혁명 케인즈 혁명에 대한 반혁명
합리적 기대 혁명 새고전학파 신케인지안


13.1 서론


모든 사회 사상이 그렇듯 경제 이론도 시대적 산물이다. 고전학파 경제 사상이 생산성 향상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했던 것과 같이 케인즈 경제학도 세계 대공황이라는 절대 절명의 실업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시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태어났다. 그리고 그 시대 상황이 변함에 따라 불황 극복의 경제 이론으로 그토록 명성을 날리던 케인지안 경제학도 한 순간 그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경제 현안이 다시금 생산성 문제로 복귀했다.
이 장에서는 케인즈 경제학의 이론적 배경과 그 내용 그리고 오늘날 새롭게 유행하는 경제 이론에 대해 개관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먼저 케인즈 경제학이 등장하여 전성기를 이루고 다시 쇠퇴한 시대적 배경을 개관한 후 케인즈의 단순 모델을 살펴본다. 그리고 케인즈 경제학을 도식화한 IS-LM 모델의 구성을 유도하고, 케인지안 경제 이론에 대한 통화론자들의 비판에서 시작된 기대 이론과 그 후 새롭게 등장한 새고전학파의 주장도 간략히 다룬다.


13.2 케인즈 경제학의 시대적 배경


1914년에 시작하여 2천만 명 이상 사상자를 냈던 1차 세계대전은 1919년에 끝났다. 그러나 이와 때를 같이하여 찾아 든 공황으로 인해 경제학에서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대규모 실업이라는 현실 문제에 직면하여 전통적인 고전학파 이론은 그 오랜 세월 쌓았던 권위를 상실했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케인즈 이론이 현실 문제를 풀 수 있는 이론으로서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 당시 세계 최선진국이었던 영국에서는 1920년만 해도 2-3%이던 실업률이 1921년에는 그 10배가 넘는 25%로 올랐고 국민 총생산은 절반으로 줄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과 집을 잃었다. 그 후 10년간은 영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이 10% 이상 가는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다. 1929부터 1933년까지의 세계 대공황 때에 이르러서는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세계 각국은 이런 실업 문제를 어떻게 하든 해결하고자 그 방법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
그때 영국의 고전학파 이론가들은 공황 발생의 원인을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파괴된 생산 기반의 상실에서 찾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당장 심각한 실업 문제를 코앞에 두고서도, 생산 기반이 복구돼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져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원론적 주장만 펴고 있었다. 실상 전쟁 중에 파괴된 생산 기반을 하루아침에 회복시킬 수는 물론 없었다.
그때 일부에서는 정부가 지출을 늘여 공공 사업이라도 벌려서 실업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정부의 시장 개입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고전학파 지지자들은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당초의 입장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가 공공 사업을 벌려 봐야 물가만 오르지 실업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반대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민간 경제가 회생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자는 말 이외에는 어떤 다른 정책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특히 심각한 불황의 깊은 늪에 빠져 있던 영국도 그리고 미국도 고전학파의 견해에 따를 것인지 아니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공공 사업을 벌려야 할 것인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아무런 실업 대책도 강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의 말처럼 외팔이 경제학자가 필요한 때였다. 불황의 심연에 빠져 있던 경제 상황에서 케인지안 견해에 따르면 정부는 경비 지출 확대 등을 통한 고용 증대 정책을 채택해서 침체된 경기를 회복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호황일 때 경기 진정책으로 사용해야 할 세 수입 확대 정책을 후버(Herbert Clark Hoover: 1874-1964) 대통령은, 균형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 당시 경기가 불황의 바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채택하여 시행하기까지 했다.

(쎄이)
한편 영국에서는 심각한 실업 문제에 직면하여 “정부가 지출을 늘여 공공 사업을 벌이는 것이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라는 제목의 재정 정책 효과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에서 그 당시 주류를 이루던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케인즈는 정식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후에 케인지안 혁명을 거쳐 새로운 주류 경제학을 형성한 케인즈와 그의 추종자들은 세계 대공황을 농업이나 공업 등 생산 기반 파괴에서 발생한 공급측 현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화폐 공급의 급격한 감소나 소비와 투자 부족 등 수요측 요인들 때문에 세계 대공황이 발생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저축은 항상 투자와 일치하여 하나의 경제가 스스로 필요로 하는 자본을 과부족 없이 축적한다”고 하는 고전학파의 대표적 상표인 쎄이(Jean Baptiste Say 1776-1832)의 법칙을 부인하고, 저축이 투자보다 많아 전체적으로 과잉 저축이 생길 수 있는 경제를 케인즈는 그의 이론 안에 포용했다. 과잉 저축의 경제에서는 과잉 자본이 축적되고 축적된 과잉 자본 때문에 총수요보다 많은 잉여 생산 시설이 발생해서 일부 설비가 놀게 되는 총수요 부족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 총수요 부족이 케인즈가 본 불황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따라서 이 과잉 저축을 줄이고 부족한 수요를 메워 나가는 것이 불황 타개를 위한 케인즈의 처방책이었다. 이런 케인즈의 견해에 의하면 소비는 수요를 늘이므로 미덕이고, 저축은 수요를 줄이기 때문에 악덕이며, 정부가 공공 사업을 벌이는 것도 부족한 수요를 늘이는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므로 정당한 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케인즈)
이런 케인즈의 주장은 주류 고전학파 정통 이론가들의 눈에는 정부의 시장 간섭을 정당하게 만드는 극단적일 뿐 아니라 극히 위험한 견해로 보였고, 따라서 이들은 케인즈를 이단자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이 이단자 케인즈의 귀에는 고전학파 지지자들이나 그 당시 영국 재무성 관료들의 “고용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는 설득의 소리는 말도 되지 않는 억지 주장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케인즈는 “무작정 기다려 보라니 그런 이론이나 정부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 아닌가?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린 모두 죽고 없다(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라고 반발했다.
1936년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 - 1946)는 나중에 케인지안 혁명의 기초가 된 “화폐, 이자, 고용에 관한 일반 이론”(貨幣, 利子, 雇傭에 관한 一般理論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이라는 표제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고전학파 모델 중에 중요한 몇몇 가정은 필요 없거나 단지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가정이어서 고전학파의 이론은 특수 이론이고 그런 가정을 전제로 하지 않는 자신의 이론은 일반 이론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많은 나라에서 상품의 재고가 쌓이고 실직자가 크게 늘어나는 것을 보아도 고전학파의 가정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손”은 마비되어 시장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게는 고전학파 이론에 있어서 상품 시장이나 투자 시장 그리고 노동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언제나 그 스스로 균형을 이룬다고 한 쎄이의 법칙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멍청이의 허튼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새로운 가정 아래 케인즈가 제시한 정책은 기존의 고전학파 정통 이론가들이 제시한 정책과는 근본에서부터 대립되는 정책이었다. 고전학파 모델에서는 단지 생산 함수와 노동 시장에서의 균형만으로 총생산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총생산은 총수요에 따라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케인즈의 새로운 모델에서는 경제가 침체되어 과잉 생산 설비를 갖고 있을 때에는 총수요가 늘면 산출량도 바로 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침체기에 총수요를 늘일 수만 있으면 총생산까지 늘이는 것이 가능해진다.

(테네시 계곡의 댐)
영국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의 경제학자들과 경제에 정부의 개입을 주장하는 정치가들은 총수요를 늘여 고용을 늘이고 생산량도 늘이자고 하는 케인즈의 경기 처방책을 크게 환영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 스스로가 고용을 늘이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통화량을 늘인다든가 경비 지출을 늘여 총수요를 늘이는 일을 하고 싶어 했고 오로지 그것이 그 당시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성 있는 유효한 실업 해결책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그 후 케인즈의 경제 정책에 근거하여 실업 퇴치라는 명분 하에 TVA(Tennessee Valley Authority: TVA) 댐 건설을 비롯한 이와 유사한 거대한 공공 투자 사업이 세계 각국에서 실시되었다. 그리고 이런 정책들은 즉각적으로 효력을 발휘했다.
이렇게 해서 케인즈 경제 이론은 1930년대의 실업 문제 해결에 혁혁한 전공을 거두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1939-1945) 후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을 선두로 자유 진영의 모든 국가에서 경제 정책 수립에 케인즈 이론을 본격적으로 도입했고, 그 효과로 세계 경제는 장기 성장을 계속했다. 때문에 적어도 2차 대전 후 1970년대 초까지 케인지안 이론은 소위 황금기(Golden era)를 맞고 있었다. 이때 케인지안 모델은 경제학에서 유일한 거시 경제 모델이었다. 1970년대 초에 심지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우리는 지금 모두 케인지안이다”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닉슨의 이 말이 나온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케인즈 이론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1970년대를 거치면서 밀튼 프리드먼을 비롯한 통화론자들의 거센 도전에 케인지안 이론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케인지안 이론에 대한 반혁명(反革命 counter revolution)이라고까지 불리는 합리적 기대 이론이 새고전학파라고 불리는 경제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케인지안 이론은 그 주류(主流) 이론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새고전학파의 비판 내용을 상당 부문 수용한 신케인지안(Neo-Keynsians)들은 가격 경직성의 전제 아래 민간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본래 케인지안의 이론적 전통에 서서 새고전학파 학자들(new classical economists)의 이론이 현실성 없는 이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13.3 케인즈 경제학이란?


13.3.1 불황 극복의 이론


힉스(J. R. Hicks: 1904- )에 의해 불황의 경제학(不況의 經濟學 economics of depression)이라고 명명된 케인즈 경제학(economics of Keynes)은 시장 만능주의를 주장하는 쎄이의 법칙을 부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케인즈는 말더스와 마르크스와 같이 경기 침체를 유효 수요 부족으로 진단하고서, 수요 부족으로 경제가 만성적인 불황에 빠져 가격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을 분석했다. 그는 실업이 있고 잉여 생산 시설이 있어 경제가 불황에 빠져 있을 때에는 고전학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시장에서의 가격은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럴 때에는 가격 조정이 일어나지 않거나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고전학파의 신축적 가격 경제(伸縮的 價格經濟 flexible price economy) 이론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때에는 가격 조정 대신 수량 조정이 이루어지는 고정 가격 경제(固定 價格經濟 fixed price economy)로 경제 체제는 이행해 간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정 가격 경제 체제에서는 경제가 완전 고용 생산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서 가격 조정이 끝나기 때문에 대규모로 실업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존재하는 비자발적 실업은 실상 만성적인 실업의 형태로 되어 시간이 간다고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 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케인즈는 시장에서 가격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발생하게 되는 대량 실업 문제는 그 해결을 위해서라면 강제적으로 부족한 유효 수요를 늘여서라도 풀어야 한다고 이해했고, 이 목적을 위해 결국 정부가 나서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우선 노동 시장에서의 화폐 임금이 하방 경직적이라는 성질을 관찰했고, 노동자들이 화폐 임금의 하락에는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실질 임금 하락에는 크게 반발하지 않는다는 점에 특히 주목했다. 따라서 그는 반발이 심한 화폐 임금을 낮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통하면 반발 없이 실질 임금을 하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실질 임금을 낮출 수 있기만 한다면 실업을 줄일 수 있으므로 고용 확대를 위해 통화 발행 정책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효과는 곧 화폐 임금 상승으로 상쇄될 것이므로 그보다는 정부가 직접 유효 수요를 창출하는 재정 정책이 효과가 크다고 그는 생각했다.
각국 정부들은 이런 그의 정책적 처방을 앞다투어 채택했다. 그리고 그 처방은 공황 타개에 주효한 정책으로 인정받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 사상이라는 흐름에서 케인즈 경제학은 그때까지 압도적이었던 고전학파의 세력을 누르고 주류 이론(主流 理論 main stream theory)으로 등장하게 된다.


13.3.2 유효 수요의 퇴장과 환류



Y (≡ C + S) > C + I 즉 S > I
Y (≡ C + S) = C + I 즉 S = I
Y (≡ C + S) < C + I 즉 S < I
대공황의 원인을 수요측 문제로 파악한 케인즈는 그의 이론을 수요측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실업과 유휴 생산 시설이 대량 존재하는 경제에서는 공급은 오직 수요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고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정부 부문이 없다고 하면 수요는 소비(C)와 투자(I)로 구분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소득(Y) 중 일부는 소비하고 나머지는 저축(S)하기 때문에 소득은 소비와 저축의 합과 언제나 일치한다. 그러나 수요를 이루는 소비와 투자의 합은 소득과 일치할 때도 있겠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고 더 크거나 적다. 이를 식으로 표시하면 위의 표와 같다.
케인즈에 의하면 국민 소득 중 저축되는 만큼의 유량(流量)은 누출되어 경제 순환 과정에서 퇴장하고, 투자되는 만큼은 다시 경제 순환 과정으로 환류한다. 여기서 유량을 그는 유효 수요(有效需要 effective demand)라고 보았다. 그래서 저축이 투자보다 많으면 그만큼 유효 수요는 줄고, 그 결과 수요 부족으로 공급 과잉이 되면서 경기는 침체한다고 이해했다. 반대로 투자가 저축보다 많으면 그만큼 유효 수요가 새롭게 생겨 경기는 되살아난다고 믿었다. 따라서 S>I 일 때에는 재고가 쌓이고, S<I인 때에는 재고는 줄어든다. 그런데 S<I 상태가 계속되면 유효 수요 증가가 과도하게 되어 결국 물가는 상승한다.


13.3.3 저축과 투자에 의한 소득 결정


소득 결정에 있어서 케인즈의 견해가 고전학파의 견해와 구분되는 결정적인 원인은 저축이 무엇에 따라 결정되는가에 있다. 고전학파의 견해는 저축도 투자처럼 이자율의 함수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저축과 투자는 이자율의 조절에 의해 언제나 균형을 이루게 된다.
케인즈도 투자 수준은 이자율의 함수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저축은 소득에서 쓰고 난 나머지로 이해했다. 즉 ‘저축은 이자율의 함수가 아니라 국민 소득 수준의 함수’라고 해석했다. 따라서 이자율이 오르내림으로써 투자와 저축은 언제나 일치할 것이라는 쎄이(J. B. Say)류의 주장은 케인즈 이론의 세계에서는 이미 헛소리가 되어 있었다. 케인즈 경제학에서는 투자와 저축의 일치는 이자율의 조절에 따라 언제나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소득이 특정 균형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 케인즈의 세계에서는 투자보다 저축이 때로는 크기도 하고 적기도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가령 저축이 더 크면 유효 수요가 경제 순환 과정에서 퇴장할 것이므로 경기는 침체에 빠지고, 그 반대면 유효 수요가 다시 환류하면서 경기는 회복할 것이 아닌가!
(그림 13-1)은 이를 그림으로 보여 준다. 소득 수준이 그림 중 Ya 수준에 이르렀다면 저축은 투자보다 많다. 그래서 유효 수요는 줄고 소득은 떨어진다. 반대로 소득이 Yb 수준에 있다면 투자가 저축보다 커 유효 수요는 늘어난다. 그 결과 소득은 증가한다. 즉 소득은 Ya의 위치에서는 Ye 쪽으로 또 Yb의 위치에서는 Ye 쪽으로 움직여 가고자 하는 성질이 있다. 환언하면 투자와 저축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균형을 이루는 쪽으로 경제는 움직이려는 성질이 있다.

13.3.4 절약의 역설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언제나 생산성 향상이 문제였다. 생산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본 축적이 필요했고, 또 자본 축적을 위해 저축을 늘여야 했다. 저축이 되야 투자가 늘 것이고 투자에 의해 생산 능력이 늘어남으로써 생산도 늘어 국민 소득이 향상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야 생산의 애로가 타결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황 시절에 케인즈가 해결해야 했던 심각한 실업 문제는 저축을 늘여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소비를 늘이고 저축은 줄여야만 해결되는 문제였다. 따라서 고전학파 모델에서 미덕이던 저축은 케인즈 모델의 세계에서는 악덕으로 되었다. 그래서 케인즈 이론의 지지자들은 사람들이 절약하여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이면 더욱 가난해진다고 하는 매우 역설적인 주장을 펴게 된다. 이 주장이 바로 ‘절약의 역설(節約의 逆說 paradox of thrift)’이다. 그러면 이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림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보자.
이제 경제가 (그림 13-2)에서 보는 것과 같이 Ea에서 균형을 이룬다고 하자. 그러면 국민 소득은 Ya, 투자는 Ie 수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사람들이 근검 절약으로 더 많이 저축하게 되어 Sa의 저축 선(線)이 Sb로 바뀌었다고 하자. 저축 증대로 균형점은 Eb로 됐다.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균형점 Eb에서는 균형 국민 소득이 Yb로 되어 저축 증대 전의 Ya보다 오히려 낮아진다. 그런데 저축은 케인즈에 의하면 국민 소득 수준의 증가 함수가 아닌가! 그러므로 적은 국민 소득 수준 Yb에서는 과거 Ya에서 이루었던 저축보다 오히려 더 적은 저축밖에 이룰 수 없게 된다. 절약해서 저축을 늘였더니 결과적으로 더 적은 저축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역설적 현상이 생긴 것이다.
13.3.5 유효 수요의 변동


앞에서 유효 수요는 소비와 투자의 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제 정부의 존재와 해외 거래를 고려하면 소비와 투자, 정부의 경비 지출(G) 그리고 수출(X)의 증가는 유효 수요의 증가를 반대로 저축과 세금(T) 그리고 수입(IM)의 증가는 유효 수요의 감소를 초래한다. 그런데 케인즈가 고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했던 당시에는 실업은 물론 생산 시설도 과잉 상태에 있어 유효 수요가 늘어 주기만 하면 생산과 고용은 그대로 늘어난다.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유효 수요 증가가 얼마만큼의 국민 소득 증가를 가져올 것인가? 앞에서 절약의 역설은 저축이 늘어 유효 수요가 줄어들면 국민 소득도 줄어드는 현상을 예로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는 그 반대 현상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총수요를 Yd라 하고 이를 식으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Yd = C + I + G + (X - IM)

또 총공급을 Ys라 하고 이를 식으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Ys ≡ C + S + T

여기서 소비 C는 수요에도 공급에도 포함되어 있다. 소비는 물론 수요측 요소지만 공급에도 포함된 것은 소비가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형성된 행태(行態) 변수이기 때문이다. 해외 부문은 수출과 수입의 차이만을 고려했다. 일반적으로 거시 경제학이 하나의 국가 경제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해외 부문은 국가 경제에 주는 영향만을 고려하고자 한 것이다. 또 총공급에 “≡” 부호가 사용된 것은 공급은 “언제나” 쓴 것과 쓰고 난 나머지의 합계와 같게 되기 때문이다.
(그림 13-3)에서 총공급 Ys는 경제가 언제나 달성할 수 있어 45도 선으로 그려졌고, 총수요 Yd는 때로는 총공급보다 많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적게 되기도 하므로 총공급 45도 선과 교차하는 선으로 그려졌다. (그림 13-3)에서 총공급이 총수요와 일치하는 점은 E이고, 그때 균형 국민 소득은 Ye이다. 그런데 경제가 과잉 생산 능력 아래에 있기 때문에 완전 고용 생산 수준은 Ye보다 큰 Yf이다. 따라서 경제가 Yf 수준의 완전 고용 국민 소득을 실현하려면 유효 수요가 늘어 총수요 Yd 선이 교차점 Ef 수준까지 올라가 줘야 한다. 즉 소비가 늘든가, 투자 또는 정부의 경비 지출이 늘든가 아니면 수출이 늘어 줘야 한다. 그러면 이들 각각의 유효 수요 증가에 따라 (그림 13-3)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에 상응하여 얼마 만큼의 국민 소득이 늘게 된다. 그 늘어나는 정도가 유효 수요를 창출한 투자나 소비 증가량의 몇 배가 된다 하여 이를 승수(乘數 multiplier)라 부른다. 가령 1조 원의 투자로 10조 원의 국민 소득 증가가 이루어졌다면 승수는 10이다.


13.3.6 케인즈의 대 경기 순환 정책


케인즈는 소비는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경기 변동을 야기시키지 않지만 투자는 주로 예상 수익과 이자율에 따라 심하게 변하기 때문에 경기 변동의 주된 원인이 된다고 이해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심하게 움직이는 투자의 변화는 그 승수 배만큼 국민 소득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승수가 크면 클수록 경기 변동은 심해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케인즈는 투자의 변동폭에 승수 배만큼 증폭되어지는 국민 소득의 변화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정부가 경비 지출이나 세금 등 정책 변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기가 좋을 때에는 세금 징수를 늘이고 경기가 침체에 빠지면 경비 지출을 늘이는 대 경기 정책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정을 수단으로 하여 경기 변동의 진폭을 줄여서 경제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개입주의자(介入主義者 interventionist)로서 케인즈가 생각한 경제 안정화 정책(經濟安定化政策 economic stabilization policy)이고 대 경기 순환 정책(對景氣循環政策 Keynesian counter-cyclical policy)이다. 이것이 또한 케인즈가 말하는 재정 정책의 요지이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때와 같이 심각한 실업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는, 정부가 나서서 대규모 공공 투자 사업을 벌림으로서 부족한 유효 수요 문제를 메워 나가야 한다고 케인즈는 말한다. 이것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공황에 대한 케인즈 경제학의 처방전이었다. 이렇게 경제 원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실업이라는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공공) 투자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켜 투자의 사회화(投資의 社會化 socialization of investment)라고 한다.


13.3.7 고전학파 이론과 케인즈 이론의 차이


여기서 잠시 케인즈 이론과 고전학파 이론의 차이를 정리하여 보기로 하자. 고전학파의 모델에서는 쎄이의 법칙이 대변하듯 수요는 공급의 종속 변수에 불과했다. 고전학파 이론가들이 공급을 중시한 것은 그 당시 심각한 생산성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등장한 케인즈 이론은 공급이 수요의 종속변수였다. 수요만 있으면 공급은 문제되지 않았다. 수요 부족으로 상점마다 재고가 쌓이고 잉여 생산 시설이나 대량 실업이 사회 문제로 되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고전학파에서 전제로 한 시장 형태는 가격 조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경매 시장 형태였다. 때문에 시장은 정보가 완전히 공개되고 가격과 이자가 자동 조절 기능을 하여 언제 어디서나 즉각 수급을 균형시킨다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케인지안 모델에서는 시장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가격 조정을 이루어내지 못하거나 아주 느린 조정만 할뿐이었다. 따라서 언제나 시장에서는 대량 수급의 불일치라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다. 케인즈는 가격 조정이 이루어지기 전에 시장은 오랫동안 수량 조정을 한다고 이해했고, 그래서 현실의 가격과 이자율이 자동조절 기능을 다하지 못해 균형 가격이나 균형 이자율보다 높거나 낮아 만성적으로 수급 불일치 현상이 생긴다고 보았다.
특히 노동시장의 기능에 대해서는 두 학파의 이론에 큰 차이가 있다. 고전학파에서는 실질 임금이 오르내리면서 노동 수급은 항상 일치하게 된다 주장한다. 그러므로 실업은 항상 자발적 실업일 뿐이었다. 그러나 케인즈 이론에서는 화폐 임금은 언제나 하방 경직적(下方 硬直的)이므로 실질 임금에 의한 노동 수급 조절 기능은 상당 부분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성적인 비자발적 실업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런 시장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케인즈는 정부 개입을 당연시했지만 고전학파는 시장의 조절 기능을 살리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만을 정부가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외에도 이자율의 움직임을 케인즈는 화폐적 현상으로 본 반면 고전학파 이론가들은 실물적 현상으로 보았다. 한편 케인즈는 저축이 소득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고, 투자는 이자율의 높낮이에 의해 그 크기가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정 인자가 서로 다른 이 저축과 투자는 균형 소득이 결정될 때라야 일치하게 되고 그 외에는 보통 불균형 상태로 남게 된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고전학파 이론가들은 저축을 대부 자금 시장에서의 공급으로 보고 투자를 그 수요로 보아 모두 이자율의 함수로 간주했다. 따라서 수요와 공급의 크기가 변하면 그에 따라 이자율이 오르내리며 변할 뿐 수급은 언제나 일치하게 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13.4 케인즈 경제학의 도식화: IS-LM 모델


(힉스)

13.4.1 IS 곡선과 LM 곡선의 도출


케인즈 이론은 케인즈의 유명한 후계자 힉스(J. R. Hicks)와 핸슨(A. H. Hansen)에 의해 도식화되었다. 힉스는 하나의 국가 경제를 4개의 시장 즉 실물 시장, 화폐 시장, 노동 시장 그리고 대부 자금 시장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3개의 시장이 균형을 이루기만 하면 나머지 시장인 대부 자금 시장은 자동으로 균형에 이른다고 하는 왈라스의 법칙(Law of Walas)을 이용하여 이를 분석 과정에서 제외시켰다. 그 후 힉스는 3개 시장에 대한 균형 조건을 분석했다. 실물 시장의 균형은 투자와 저축의 일치, 화폐 시장과 노동 시장에서의 균형은 각각 그 수요와 공급의 일치라는 조건이 만족될 때 달성되는 것임은 물론이었다. 이때 실물 시장과 화폐 시장의 균형 조건에서부터 그는 총수요 곡선을 유도했다. 그리고 노동 시장의 균형 조건과 노동으로부터 상품으로의 전환 관계인 생산 함수의 성질을 이용하여 총공급 곡선도 도출했다. 그 후 이 총수요 곡선과 총공급 곡선이 일치하는 곳에서 최종적으로 물가가 결정된다는 것을 (그림 13-9)에서와 같이 보여 주었다.
그러나 케인즈 모델에서 중시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효 수요의 부족이었다. 그런데 실물 시장의 균형 조건인 투자와 저축의 일치는 하나의 이자율 수준에서 하나의 국민 소득 수준이 대응하게 된다. 따라서 이자율과 국민 소득의 평면 위에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하나의 곡선이 도출된다. 사람들은 투자(Investment; I)와 저축(Saving; S)의 일치라는 조건을 충족할 때 생기는 곡선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가리켜 IS곡선이라고 불렀다. (그림 13-4)는 그림으로 IS곡선의 도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제2 상한은 이자율의 감소 함수를 보이는 투자 곡선이, 제4 상한은 국민소득 수준과 비례하는 저축선이 그려졌다. 그리고 제3 상한은 투자와 저축이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부과했다. 그래서 이자율과 국민 소득 평면(제1 상한) 위에 투자와 저축이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점들을 연결하면 우리가 찾는 IS곡선을 얻는다.
한편 화폐 시장에서의 균형 조건은 화폐 수요와 실질 화폐 공급이 일치할 때 달성된다. 그런데 이 조건도 하나의 이자율이 하나의 국민 소득과 대응하기 때문에 이자율과 국민 소득이라는 평면 위에 하나의 곡선을 형성해 놓는다. 사람들은 이 곡선을 LM곡선이라고 부른다.
(그림 13-5)는 그림으로 LM곡선이 유도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제2 상한은 사람들이 투기 목적으로 화폐를 수요할 때에는 그 화폐 수요는 이자율의 감소 함수가 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또 제4 상한은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서 상거래를 위해 필요로 하는 화폐 수요는 그 크기가 소득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제3 상한은 정부의 통화 공급이 화폐 수요와 일치한다는 조건을 부과한 것이다. 여기서 M/P는 통화량 M을 물가 P로 나눈 것으로 실질 통화량 수준(즉 실질 화폐 공급 수준)을 나타낸다. 이 실질 화폐 공급이 투기적 화폐 수요와 거래적 화폐 수요를 합한 총 화폐 수요와 일치할 때 화폐 시장은 균형을 이룬다. 이런 균형 조건을 이자율과 국민 소득의 평면(제1 상한) 위에 나타내면 우측으로 상향하는 LM곡선을 얻는다.
그런데 유효 수요는 실물 시장에서의 균형과 동시에 화폐 시장에서 균형이 이루어져야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IS곡선과 LM곡선이 만나는 점에서야 하나의 이자율에 대응하는 하나의 유효 국민 소득 수준(즉 유효 수요)이 결정된다. (그림 13-6)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이자율 ie에 대응하는 유효 수요는 Ye로 된다.


13.4.2 총수요 곡선과 총공급 곡선


그런데 실질 화폐 공급량은 물가 수준에 따라 그 크기가 결정된다. 가령 물가가 올랐다면 오르기 전의 실질 화폐 공급량과 오른 후의 실질 화폐 공급량은 같을 수 없다. 명목 화폐 공급량이 일정하다면 물가가 오름에 따라 실질 화폐 공급량은 줄어들어 LM곡선은 수축하는 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이에 따라 유효 수요도 줄어든다. 따라서 물가 인상은 일대일로 대응하는 유효 수요(유효 소득 수준)의 축소를 수반하게 되므로 (즉 물가 인상과 수요 감소가 짝을 이루게 되므로) 가격(즉 물가)과 소득의 평면 위에서 (그림 13-7)과 같이 우측으로 하향하는 하나의 총수요 곡선을 그리게 된다.
한편 노동 시장에는 임금의 하방 경직성(화폐 임금은 일단 올라가면 낮출 수는 없다) 때문에 비자발적 실업이 존재한다. 그래서 가령 물가가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명목 임금이 오르지 않고 그대로 있게 된다면(비자발적 실업이 존재하므로 그대로 있게 된다), 실질 임금이 떨어지고 그 결과 노동 수요가 늘어나 고용이 늘고 당연히 생산도 는다. 달리 말하면 물가 인상은 실질 임금을 낮춰 생산을 증가시킨다. 따라서 물가와 소득의 평면 위에 (그림 13-8)과 같이 총공급 곡선은 우측으로 상향하는 곡선으로 된다.
이제 우측으로 하향하는 총수요 곡선과 우측으로 상향하는 총공급 곡선은 (그림 13-9)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한 점에서 만나고 그곳에서 균형 물가(Pe)와 균형 국민 소득 수준(Ye)이 결정된다.
지금까지 논의 내용이 IS-LM 모델의 기본 골격이다. 케인지안들은 이 모델을 이용하여 화폐 정책과 재정 정책의 효과를 그림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정책을 통한 총수요 확대는 비록 물가를 올리기는 하지만 동시에 생산을 증가시킨다(이는 총공급 곡선이 우측으로 상향하는 곡선이기 때문이지만)는 결론에 도달했다.


13.5 필립스 곡선의 성립과 붕괴 그리고 그 이후


13.5.1 필립스 곡선의 성립과 붕괴


물가 상승은 생산 증가를 가져온다는 이런 이론상의 결론은 그 당시 실증적으로도 증명된 것처럼 보였다. 1958년 런던 스쿨의 경제학자 필립스(A. W. Phillips 1914-75)는 1861년부터 1957년까지에 걸친 영국 자료를 갖고 화폐 임금률과 실업률간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거기서 ‘실업률과 화폐 임금 상승률 사이에는 역의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혔다. 이는 달리 말하면 물가와 생산 사이에 양(陽)의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를 근거로 케인지안들은 실증적으로도 그들의 정책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물가 인상을 각오하기만 하면 생산을 늘이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실업이 문제된다면 물가 인상 정책을 쓰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이런 케인지안들의 정책에 대해 1970년대가 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 효력을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경제학에는 큰 이변이 일어났다. 1973년 미국이 월남전에서 패배하는가 싶더니 10월에는 중동 전쟁이 터지고 1974년 초에는 걸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석유 칼텔 OPEC이 석유류 가격을 전년에 비해 400%나 기습 인상했다. 이에 세계 경제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각국 통계는 물가 인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실업 증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까지 경제의 장기 번영을 케인지안 정책의 덕분으로 생각하고 그 공적을 구가하던 경제학자들은 이런 새로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해 했다. 과거 통계에서 물가 인상과 고용 확대 사이의 양의 상관 관계를 보여주던 그래서 그 관계를 철석같이 믿었던 필립스 곡선이 이번에는 그 통계 숫자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파괴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경기가 침체의 늪에 빠져들어도 그들의 유일한 무기인 물가 인상을 감수하고 고용을 확대하고자 하는 정책을 쓸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물가 상승과 동시에 경기 침체를 경험하고 있는 마당에 함부로 물가 상승을 유발시키는 정책을 구사했다가는 경기 침체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나 아닌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13.5.2 통화론자들의 공격과 공급 중시론자의 등장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경제학자들은 오랜 세월 줄기차게 케인지안의 총수요 확대 정책을 비판해 오던 통화론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어설픈 이론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실상 그때까지 케인지안들은 밀턴 프리드먼 등의 통화론자 주장을 미친놈의 허튼 소리라고 비웃으며 무시하고 있었다. 프리드먼은 1967년 미국 경제학회 회장직 수락 연설에서 이미 경제가 완전 고용 수준(즉 자연 실업률 수준)에 이른 상황에서 정부가 총수요 확대 정책을 쓰는 것은 곧 고용 확대라는 효과는 없이 물가 인상이라는 대가만 치를 뿐이라고 주장(이를 자연 실업률 가설이라고 한다)했었다. 이때 그는 사람들의 기대가 물가와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이에 영향받은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의 기대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실상 케인즈의 모델에서는 단순하게 ‘사람들은 현재의 물가가 앞으로도 그대로 지속될 것’이라는 단순 기대(單純期待 naive expectation)를 가정(단순 기대 가설이라고 한다)하고 있었다. 이를 프리드먼은 ‘사람들은 과거의 물가 인상의 정도를 파악하고는 앞으로도 그만큼의 물가 인상은 지속될 것으로 믿는다’는 소위 적응적 기대(適應的 期待 adaptive expectation) 가정(이를 적응적 기대 가설이라고도 한다)을 도입했다. 그의 가정을 전제로 해서 총공급 곡선을 그리면 케인지안의 총공급 곡선의 기울기보다 그 경사도가 훨씬 급하게 되고 또 완전 고용 수준에서는 거의 수직으로 서게 된다.
경제학계에서 기대 이론이 한참 논의되던 1970년대 말 미국 정부의 경제 정책은 인플레이션 제거 정책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1980년대가 시작하자마자 레이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미국 경제 정책 수립자들은 수요 중심의 케인지안 정책에서 생산 중심의 공급 중시 경제 정책으로 코페르니크스적 전환을 시작했다. 케인지안류의 거품 증가식 경제 정책 때문에 미국 경제는 대외 경쟁력을 잃었고, 그래서 미국은 거대한 무역 적자라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고 경제학자들은 분석했다.


13.5.3 새고전학파와 신케인지안의 등장


이때 시카고 대학의 루카스(Robert E. Lucas Jr. 1937- )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젊은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기대를 이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활용하면서 합리적으로
(존 무스)
형성한다’고 하는 합리적 기대(合理的 期待 rational expectation) 가정(이를 합리적 기대 가설이라고 한다)을 전제로 경제학을 다시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라 총공급 곡선을 그리면 그 경사도는 고전학파의 이론에서와 같이 거의 수직으로 서는 것이었다. 어떻든 이런 합리적 기대 가정을 전제로 그들은 경제 이론을 처음부터 새롭게 구축했다. 그들의 새로운 경제 이론에 의하면 과거 단순 기대 가설 아래서 전개되었던 모든 케인지안 경제 정책은 그 타당성이 의심스러워졌다. 특히 ‘사람들이 기대를 합리적으로 형성하고 임금과 물가가 신축적으로 조정된다고 전제하면 예상된 정부의 정책은 실질 생산이나 실업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는 새고전학파의 정책 무용성 주장(政策 無用性 主張 policy ineffectiveness proposition)에 이르러서는 케인지안 경제 정책은 몽땅 무효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경제 이론 자체를 고전학파의 이론으로 회귀시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미국 경제가 생산성 문제에 봉착하게 됨에 따라 루카스 등 젊은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고 동시에 그때까지 주류를 이루던 케인지안 이론은 쇠퇴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과거 대공황 시절에 케인즈가 신축적 가격을 전제로 한 고전학파 이론을 거부하고 가격 경직성에 근거하여 거시 경제 이론을 다시 전개함으로써 케인지안 혁명(Keynesian revolution)을 이룬 것에 비유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케인지안 이론을 뿌리부터 거부하고 다시 고전학파 이론으로 접근하는 루카스 등의 학문적 영향력을 가리켜 케인즈 혁명에 대한 반혁명(反革命 counter revolution) 또는 합리적 기대 혁명(合理的 期待 革命 rational expectation revolution)이라고 불렀다.
같은 때에 레이건 행정부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경제 정책 목표로 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위해 통화 긴축 정책을 쓰면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경기가 더욱 침체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예상된 정부의 정책은 실질 변수에 대해서는 그 효과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 새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정책 무용성 주장이 나온 것이었다. 그 내용인즉 통화 공급 억제 정책을 국민들에게 잘 홍보하여 사용한다면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이 없어질 것을 예상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새고전학파에서 지적한 예상된 정책으로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고전학파 이론대로라면 물가 안정을 기하면서도 실질 변수인 실업에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고 통화 긴축 정책을 원활히 집행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책 집행 결과는 실망적이었다. 그리고 새고전학파 이론도 그 결과에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로버트 고든)
한편 새고전학파 이론에 의해 난타당한 케인지안 이론은 과거의 영광을 순식간에 잃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케인지안들은 그들 이론이 비현실적인 가정 위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들도 합리적 기대 가설을 수용한다. 그러나 가격 경직성이라는 케인지안의 기본 가정만은 견지하면서 메뉴 비용이라든가 효율적 임금 이론 또는 내부자-외부자 이론 등 케인지안 특유의 다양한 이론을 전개한다.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는 맨큐(Gregory Mankew), 애컬롭(George Akerlof), 고든(Robert J. Gordon) 등의 학자들을 가리켜 신케인지안(Neo-Keynesian)이라고 부른다. 그 후 새고전학파와 신케인지안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더욱 현실 설명력을 갖는다고, 또 자신들의 정책이 더욱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심한 이론 논쟁을 지속하고 있다.


13.5.4 신경제 시대에 우리 경제는?


어떻든 케인지안 시대는 지났다. 신고전학파의 경제이론은 노동시장을 비롯하여 모든 시장에서의 가격 경직성을 해소시켜야 대외 경쟁력을 갖춘 신경제(新經濟 New economy)를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들을 위시해서 많은 나라에서는 그 사이 과열되었던 경제에서 거품을 제거했다. 그리고 동시에 세계적 규모로 디플레이션 시대가 열리면서 국가간 기업간 경쟁은 심화되었다. 미국은 소련 체제가 붕괴하자마자 대대적으로 군수산업 통폐합에 착수했다. 냉전 시대를 뒤로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미국의 선택은 신고전학파의 처방에 따라 냉혹한 시장기능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독일은 서유럽을 단일 통화 사용의 단일 경제권으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은 경상수지 흑자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 전체가 희생하는 장기 경기불황까지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남들은 경제에서 거품을 제거하고 그들 나름대로 세계적 불황에 대비하고 있을 때 우리는 ‘세계화 세계화’라고 게거품을 물어가면서 떠들고 단녔던 대통령을 갖고 있었으니 어찌 이 경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어찌 IMF의 경제통제를 받지 않고 베길 수 있었을 것인가! 우리는 지금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타력에 의해 경제 구조 조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앞날에 대한 비젼도 없이 급류에 흔들리는 조각배 같은 모습으로 우리 경제는 지금 표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케인지안 정책에 대한 짙은 향수에 젖어들고 있다.


13.6 요약


☞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학에서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대규모 실업이라는 현실 문제에 직면하여 전통적인 고전학파 이론은 무너져 내렸고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케인즈 이론에 실업 문제 해결의 이론적 근거를 찾았다.

☞ 과잉 저축을 줄이고 부족한 수요를 메워 나가는 것이 불황 타개를 위한 케인즈의 처방이었다. 케인즈에 의하면 소비는 미덕이고, 저축은 악덕이며, 정부가 공공 사업을 벌이는 것도 부족한 수요를 늘이므로 정당한 정책이었다.

☞ 많은 경제학자들과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모두 총수요를 늘여 고용을 확대하고 생산도 늘이자고 하는 케인즈의 경기 처방책을 크게 환영했다.

☞ 케인즈 경제 이론은 1930년대의 실업 문제 해결에 혁혁한 전공을 거두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모든 국가에서 경제 정책 수립에 케인즈 이론을 본격적으로 도입했고, 그로 인해 세계 경제는 장기 성장을 계속했다.

☞ 케인즈는 말더스와 마르크스와 같이 경기 침체를 유효 수요 부족으로 진단했다. 그는 잉여 생산 시설이 있어 경제가 불황에 빠져 있을 때에는 가격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대신에 수량 조정이 이루어지는 고정 가격 경제로 경제 체제가 이행해 간다고 생각했다.

☞ 고정 가격 경제 체제에서는 경제가 완전 고용 생산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서 가격 조정이 끝나기 때문에 대규모 실업이 존재하게 되고, 이렇게 해서 존재하는 비자발적 실업은 만성적 실업의 형태로 언제까지나 남게 된다.

☞ 케인즈는 시장에서 가격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발생하게 되는 대량 실업 문제는 그 해결을 위해서라면 정부가 강제적으로 부족한 유효 수요를 늘여서라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국민 소득 중 저축되는 만큼 유효 수요는 누출되어 경제 순환 과정에서 퇴장하고, 투자되는 만큼은 다시 경제 순환 과정으로 환류한다고 케인즈는 생각했다.

☞ 고전학파 이론에서는 저축도 투자도 모두 이자율의 함수이다. 그러나 케인즈의 이론에서는 투자는 이자율의 함수이지만 저축은 국민 소득의 함수로 간주된다.

☞ 고전학파 모델에서 미덕이던 저축은 케인즈 모델의 세계에서는 악덕으로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절약하여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이면 더욱 가난해진다고 하는 매우 역설적인 주장이 나오게 된다. 이를 ‘절약의 역설’이라고 한다.

☞ 유효 수요 증가에 따라 국민 소득이 증가하는 정도를 승수라고 한다. 가령 1조 원의 신규 투자로 10조 원의 국민 소득 증가가 이루어졌다면 승수는 10으로 된다.

☞ 케인즈는 투자의 변동폭에 승수 배만큼 증폭되어지는 국민 소득의 변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경기가 좋을 때에는 세금 징수를 늘이고 경기가 침체에 빠지면 경비 지출을 늘이는 대 경기 정책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사람들은 케인즈의 대 경기 순환 정책 또는 대 경기 안정화 정책이라고 한다.

☞ 경제 원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실업이라는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투자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켜 투자의 사회화라고 한다.

☞ 고전학파에서 전제로 한 시장 형태는 가격 조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경매 시장 형태였다. 그러나 케인즈는 가격 조정이 이루어지기 전에 시장은 오랫동안 수량 조정을 한다고 보았다.

☞ 케인즈는 이자율의 움직임을 화폐적 현상으로 본 반면 고전학파 이론가들은 실물적 현상으로 보았다. 케인즈는 저축이 소득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 반면 고전학파 이론가들은 저축이 이자율의 함수라고 해석했다.

☞ 힉스는 실물 시장과 화폐 시장이 균형될 때 만들어지는 유효 수요를 하나의 곡선으로 유도했다. 그리고 노동 시장의 균형 조건과 생산 함수의 성질을 이용하여 총공급 곡선을 도출했다. 그 후 이 총수요 곡선과 총공급 곡선이 일치하는 곳에서 최종적으로 물가와 소득 수준을 결정하는 모델을 구축했다.

☞ 실물 시장에서 저축과 투자의 균형 조건으로부터 IS 곡선이 유도되고, 화폐 시장에서 화폐 수요와 화폐 공급이 일치하는 조건으로부터 LM 곡선이 유도된다.

☞ 1958년 런던 스쿨의 경제학자 필립스는 실증 분석으로 ‘실업률과 화폐 임금 상승률 사이에는 역(逆)의 상관 관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이는 물가와 생산간에 양의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다.

☞ 1970년대 각국 통계는 물가 인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실업 증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물가 인상과 고용 확대간의 양의 상관 관계인 필립스 곡선이 파괴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 결정자들은 함부로 물가 상승을 촉진시키는 정책을 구사할 수는 없었다.

☞ 케인즈의 모델에서는 단순하게 현재의 물가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단순 기대를 가정하고 있었다. 이를 프리드먼은 과거 물가 상승 속도만큼 앞으로도 물가가 오른다는 적응적 기대로 그 가정을 바꾼 후 경제 이론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루카스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기대를 합리적으로 형성한다’고 하는 합리적 기대 가정을 전제로 경제학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정을 전제로 그려지는 총공급 곡선은 고전학파의 총공급 곡선처럼 수직에 가깝게 그려진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새고전학파라고 부른다.

☞ 사람들은 케인지안 이론을 뿌리부터 거부하고 다시 고전학파 이론으로 접근하는 루카스 등의 연구 방향을 가리켜 케인즈 혁명에 대한 반혁명 또는 합리적 기대 혁명이라고 불렀다.

☞ 냉전 시대를 뒤로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미국의 선택은 신고전학파의 처방에 따라 냉혹한 시장기능을 되살리는 것이었고, 독일은 서유럽을 단일 경제권으로 통합하는 것이었으며, 일본은 국제수지 방어를 목표로 국민 전체가 희생하는 장기 경기불황까지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까지 거품 경제마저 식힐 줄 모르고 있었으니 어찌 IMF의 경제통제를 받지 않고 베길 수 있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