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8일 화요일, 주요 조간 신문 칼럼
[중앙일보 칼럼-중앙시평/윤영관(서울대 국제정치학)-20080408화] 새터민 정책을 업그레이드해야
“북 에선 배고파 못 살겠고, 중국에서는 두려워 못 살겠더니 한국에선 몰라서 못 살겠다.”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1만3000여 새터민(탈북 주민)들의 형편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국가 지시대로 따라서 하기만 하면 됐던 세상에서 벗어나 이제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알아서 해야 되는 자유시장 경쟁체제에서 살게 됐다. 마치 게임의 규칙을 모른 채 경기장에 내몰려진 선수처럼 외롭게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한국 사회에 다른 사회적 약자도 많은데 왜 이들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현장에서 스스로 알아서 생존법칙을 익혀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적자생존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새터민들의 경우는 좀 다르다. 이들은 애당초 게임의 규칙 그 자체를 습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새터민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인 기회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 또한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새로운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도록 돕는 일은,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큰 변화에 미리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부에서도 그동안 나름대로 노력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정착금 지원과 관련해 새터민 스스로의 자활의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꾼 것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새터민들의 숫자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급증하다 보니 변화하는 현실을 정부 정책이 따라잡지 못하는 형국이다.
새터민 문제는 크게 보아 취업 지원, 청소년 교육, 심리적 적응 문제가 있다. 취업의 경우, 2006년 초 이후 입국한 새터민들의 취업률이 24%밖에 안 되는 것으로 최근 보도됐다. 이들은 어렵게 취업해도 새로운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주 그만둔다. 시장경제 체제에 아직 익숙해 있지 못하고 자신들의 희망 직종에 대한 기대치가 객관적인 능력보다 높기 때문이다. 고용주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노동생산성이 낮은 새터민 노동자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에서 살아온 그들이 부닥치는 문제점들을 정밀하게 분석해 반영해나가면서 정부 차원의 보다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직업훈련과 적응훈련 시스템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민간 단체들의 역량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지금과 같이 하나원에서 하는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의 2개월 소양교육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나원 시설도 증축 수준이 아니라 앞을 멀리 보고 대규모로 확장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 교육문제도 심각하다. 우리는 초·중등 교육과정이 12년인데 북한은 10년제고 그나마 그곳에서의 교육 내용이 경제난 등으로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탈북 후 외지에서 3~4년씩 피해다니며 살다 보니 공부할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올 1월 한반도평화연구원이 인수위에 전달한 ‘새터민 청소년 교육을 위한 정책 제안서’에 따르면 중·고등학교 교육 적령기의 새터민 청소년 취학률은 62%, 교육적령기를 넘긴 청소년 취학률은 10.4%에 불과하다. 그나마 취학 학생들의 중도 탈락률도 남한 학생의 10배에 달하고 있다.
우리 사회 전반에 공교육 부실이라는 이야기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나마 부실하다는 공교육 체제에마저도 흡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보다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교육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많은 비인가 민간학교들이 그나마 취학하지 않은 학생들을 돌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학력 인정 대안학교의 설치기준을 낮추어 이들 민간부문의 능력을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국민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원을 나와 취직 하려 애쓰던 한 새터민 중년 여인을 면담한 적이 있다. 그는 취업이 잘 안 되어 심한 우울증과 절망감에 빠져 있던 차에 우연히 만난 어느 백화점 점원으로부터 “한국에 잘 오셨습니다. 열심히 사세요”라는 친절한 말 한마디에 다시 힘을 내 일어섰다고 한다. 모든 국민이 이들을 품어 안을 수 있도록 정부와 교육기관, 그리고 언론 차원의 캠페인도 벌였으면 좋겠다.
사람의 일이나 국가의 일이나 한 가지 철칙이 있다. 그것은 뿌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뿌려야 할 시기를 놓친 뒤에 고통받으며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우리는 새터민 정책을 업그레이드함으로써 미래를 위해 뿌려야 할 때다.
[경향신문 칼럼-여적/김철웅(논설위원)-20080408화]철학의 부활
“세상에는 많은 공부가 있다. 제일 어려운 것이 과거 공부이고 그 다음이 행정실무 공부이고 그 다음이 고문(古文) 공부이다. 고문인 문(文)·사(史)·철(哲)을 익히 배운 뒤에 과거 공부나 행정실무 공부를 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성공할 수 있으나 고문에는 어두우면서 과거 공부만 한다면 뒷날 아는 것이 없어서 크게 고생만 한다.” 다산 정약용의 ‘위다산제생증언(爲茶山諸生贈言·제자들을 위해 베푼 말)’을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풀어 쓴 글이다. 다산은 이렇게 고문, 요즘 말로 문학, 역사학, 철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임을 일깨웠다.
원로 역사드라마 작가 신봉승은 ‘문사철 600’의 전도사다. 이 말은 “30대 안쪽에 문학책 300권, 역사책 200권, 철학책 100권을 읽어야 참된 지식인, 교양인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문학은 ‘언어의 보고(寶庫)’로서, 역사는 ‘체험의 보고’로서, 철학은 ‘초월의 보고’로서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터넷에서 얻는 단편적 지식으로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없다면서 젊은이들에게 ‘문사철 600’에 도전할 것을 권하고 있다.
문학·사학·철학 순으로 부르는 것은 관행일 뿐이다. 철학을 앞세워도, 역사가 앞에 가도 상관 없다. 문사철은 학문의 근본이 되는 인문학, 즉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학문을 뭉뚱그린 말이다. 그럼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인문학, 문사철은 이 땅에서 외면당하고 있다. 대학에서 취업률이 낮아 미달사태가 나고 폐과의 운명을 겪기도 한다. 몇년 사이 없어진 철학과만 해도 10여곳에 이른다.
이런 형편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요즘 철학이 대학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의 도덕성이나 최근 정치적 관심사에 대해 철학적 관점으로 접근하려는 신세대 학생들이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많은 대학에서 철학 전공자가 1990년대와 비교해 2배나 늘었다. 정치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철학이 그 모선(母船)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확산된 덕이다. 탁상공론식이고 철학고전에 의존하던 교육방식을 바꿔 심리학, 경제학 등 다른 학문과 접목시키는 시도도 주효했다. 요컨대 학생들이 재미를 느끼게 하는데 성공했다는 얘긴데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매일경제신문 칼럼-테마진단/김상겸(동국대 법대 교수)-20080408화] 생명의 가치와 사형제도
최근 아동에 대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우리 사회는 충격에 휩싸이고 있다.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고도 별다른 죄의식을 못 느끼는 가해자를 보면서 사람들은 놀라움과 분노를 금하지 못하고 있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살인 사건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다시금 사형제 존폐 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이미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에 대하여 사형제 폐지를 권고하였고, 인권단체와 상당수 사람들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사형 폐지국가가 늘어나는 추세며, 정부도 1998년부터 10년 넘도록 사형 집행을 실시하고 있지 않다. 이로 인하여 국제적으로는 우리나라도 실질적 사형 폐지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사형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인권보장 차원에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생명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비록 살인범의 생명이라 해도 국가가 제도적으로 박탈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오판으로 인하여 억울한 생명이 희생된다면 무엇으로도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천부적인 것으로 국가법질서 아래에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헌법재판소가 언급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생명의 가치도 다양한 사람이 더불어 사는 이 사회에서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절대적 가치는 오히려 공허해진다. 왜냐하면 인간사회는 완벽한 신의 세계도 아니고 누구나 생명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생명을 존중할 때만 자신의 생명도 존중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인격에 기초하고 있다. 스스로 인격을 포기하면 이를 존중할 방법이 인간사회에는 없다. 우리 헌법도 이러한 기본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피해자 인권이 중요한 만큼 가해자 인권도 중요하다. 그러나 타인의 생명을 빼앗고도 이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인간사회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길은 없다. 생명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타인의 생명을 무참하게 빼앗으면서 커다란 죄의식도 없는 자에게 생명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사회가 무고한 생명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살인범에게도 공정한 재판 기회를 부여하고 재판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범죄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은 별개 문제다. 형벌 기능이 현대에 오면서 응보에서 교화로 바뀌었다 하여도 응보의 성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기를 부정하고 반성을 모르는 교활한 살인범에게 교정과 교화를 기대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자기기만이다.
오늘날 국가 기능은 법의 기능이다. 헌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법 체계가 구축되어 있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권리를 보호하라는 것이다. 물론 사형제가 어떤 범죄예방 효과가 있는지 명백하게 검증된 바는 없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살인 사건과 인명을 경시하고 무고한 생명을 무참하게 살해하면서 죄의식을 못 느끼는 가해자 모습에서 사형제가 갖는 최소한의 의미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현실이다. 이제 단순한 살인범에게 사형을 선고하지는 않는다. 정치범이나 사상범에게도 사형선고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 실정법에는 불필요한 사형 규정이 너무 많다. 이를 시급히 정리하여 최소한의 규정만 두고 규범력을 확보해야 한다. 무참하게 사람의 생명을 짓밟고 인성을 상실한 살인범죄가 없는 사회가 될 때까지 사형제는 대다수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안전장치로 남겨놓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권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어야 한다.
[서울경제신문 칼럼-데스크 칼럼-20080408화] 껍데기는 가라
299명의 국민대표를 뽑는 18대 총선이 하루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일각에서는 이번 총선 투표율이 50%에도 못 미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도 내놓고 있다. 이유는 안정적 국정운영과 1당 독주의 견제를 여야가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뚜렷한 정치적 이슈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지난 수십년간 겪었던 우리 정치에 대한 환멸과 혐오감이 주된 이유일 수도 있다. 대의정치는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고 그들이 나라 일을 대신 하도록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를 꾸려가는 데 효율적인 수단으로서의 대의정치에서 국민들은 싫든 좋든 나라 살림을 대신할 대표를 뽑아야 한다. 비록 정치가, 정치인이 꼴 보기 싫더라도 적극적으로 투표를 해야 민주정치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의 대표를 뽑는 개개인의 투표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투표를 한다고 해서 민주정치가 이뤄진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라는 이상적인 제도를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방법일 뿐이다.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사람을 딱 두 종류로만 분류한다고 한다. 국회의원 배지를 단 사람과 달지 못한 사람. 배지를 달고 못 달고는 정치권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엄청나다. 그래서인지 선거에 나선 후보들을 보면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죽기 아니면 살기다.
당연히 공천과정이나 선거를 통해 후보들의 면면은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국민의 대표로 뽑아달라고 나선 인사들 중에는 함량미달도 부지기수다. 표를 구할 때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90도 각도로 넙죽 절을 하다가도 배지를 단 순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국민들 위에 군림하려는 어줍지 않은 국회의원들을 그동안 숱하게 봐왔다. 탄핵 돌풍에 힘입어 엉겁결에 배지 달고서는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고 안하무인으로 지난 4년 동안 설쳐댄 '얼떨리우스' 의원들이 바로 좋은 예다.
이들이 잘못을 저지를 경우 1차적 책임은 물론 당사자에게 있겠지만 잘못에 따른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부담해야 한다. 따라서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두 눈을 부릅뜨고 꼼꼼히 살펴 참일꾼을 가려야 한다. 딱히 마땅한 인물이 없으면 차선의 인물을, 차선도 없으면 차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국민만 손해를 보게 된다. 일을 저지르는 건 정치인일지 몰라도 그 결과에 대한 뒤치다꺼리는 국민이 고스란히 나눠 감당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표장에 가지도 않고 그날을 그냥 휴일처럼 보낸 국민은 정치가 어떻느니 이러쿵저러쿵 비판할 자격조차 없다.
물론 후보자들 면면의 성향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알맹이만을 골라내는 현명한 표심이 필요하다. 우선 지역주의를 등에 업고 어떻게 한번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보겠다는 후보는 일단 제쳐놓아야 한다. 지역주의야말로 우리 정치발전의 발목을 수십년간 잡고 흔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또 국민이 맡긴 권력을 마치 자기가 갖고 태어난 것처럼 개인적인 이익에 활용하는 정치인도 배제해야 한다. 이런 인물일수록 입후보 때의 초심을 잃고 당선되면 거들먹거리기 일쑤다.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가 있는 후보도 요주의 대상이다. 이권을 좇다 보면 나라일은 뒷전이고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더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정치적 행위를 과장되게 혹은 허위로 꾸미거나 거짓말을 해서 국민을 속이는 정치인도 솎아내야 한다. 국민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당을 깨고 새로 만들고 이리저리 불나방처럼 날아다니는 분식 정치인도 걸러내야 한다. 시인 신동엽은 '알맹이는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이제 국민들이 알맹이는 걸러내고 껍데기는 골라내야 할 때다. 내일 우리들의 한표가 앞으로 대한민국 4년을 좌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