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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앵커브리핑중 우연인지 의도적인지…'코드명 체로키'

eros 2017. 5. 25. 23:00




미국시각 1980년 5월 22일 오후 4시 미 백악관 상황실.

광주에서 첫 집단 발포가 벌어진 직후에 미국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모인 이른바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는 철저히 미국의 안보 논리에 의해서 진행됐고 미국은 그 직전에 있었던 신군부의 발포행위를 받아들였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시민군에 대한 사형선고' 라고 표현했습니다. 광주 시민의 생사를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회의에 걸린 시간은 불과 75분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광주 시민들은 하루만 더 버티면 미국이 도우러 올 것이라고 믿었으니…아이러니, 즉 예상과는 반대의 비극적 결말은 이미 준비되고 있었던 셈입니다.

당시 그 회의의 정황을 보다 자세히 기록한 메모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은, 오랜 독재 끝에 전 재산이 단돈 29만 원밖에 안 남았다고 주장했던, 그리고 최근의 자서전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씻김굿의 제물"이라 주장하고 있는 당시의 젊은 권력자….

그리고 최근에 이 메모를 발견한 이들은 역시 아이러니컬하게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들에 의해 불에 타버렸던 한 방송사의 기자들이었습니다.

엊그제(23일) 앵커브리핑은 역사는 우연이라는 옷을 입은 필연으로 나타난다는 말을 인용해 드렸지만,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는 또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덧붙이는 이야기.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이 노래,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 주인이었던 체로키 인디언들이 불러왔던 노래입니다.

코드명 "체로키" 미국이 1980년 5월을 전후한 한반도 위기관리를 위해 조직했던 비상대책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광주를 이야기하면서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자신들이 학살한 인디언 부족, 체로키의 이름을 코드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경향신문 2015년 5월18일 시론] 5·18 그리고 ‘체로키’


근 200년이 지나서였다. 2010년 5월 미합중국이 체로키를 비롯, 5개 미 인디언 부족들에게 자신들의 ‘잘못된 정책’과 폭력행위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게 말이다. 그 이전 2009년 12월 오바마 대통령은 ‘원주민 사과 결의안’에 서명했다. 대통령이 서명한 결의안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미합중국 국민을 대신해 미합중국 시민들에 의해 원주민들에게 가해진 폭력, 학대와 멸시에 대해 모든 원주민들에게 사과합니다.” 이로써 서부의 영웅 존 웨인은 무법자가 되었다.


국가폭력에 대한 국가의 사과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건 발발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03년 10월 대통령 노무현은 “저는 4·3진상조사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다,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은 사과했다. 


광주 5·18 역시 1988년 이후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 명칭을 달고, 이제 광주는 우리만의 광주가 아니라 아시아 평화·인권운동의 상징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인과 사슬에서 빠진 고리가 있다. 미국이다, 아니 미국의 사과다. 제주 4·3만 보더라도 미·소 간 동서냉전이 베를린 봉쇄를 전후 그 고점을 향해 치달을 때, 동아시아의 변방 제주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이후 벌어진 제주 홀로코스트는 강경진압을 최종 지휘한 미군정에 우선적인 책임이 있다. 


미국에 있어 1979년 ‘한국위기’란 1979년 10·26부터 5·18을 거쳐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미 레이건 대통령을 예방하는 그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의 한·미관계, 특히 5·18에서 미국의 역할을 그나마 촘촘하고 객관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체로키 파일’이 있어서다. 우리가 이 극비문서들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오롯이 미 언론인 팀 셔록 덕분이다. 10·26이 발발하자 당시 미 국무장관 밴스는 코드명 ‘체로키’라는 일종의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편성해 서울의 미대사관과 동시간으로 상황을 공유하고자 했다.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CIA, 미합참 등 최고위급 관계자에게만 접근이 허락된 이 망을 당시 대통령 지미 카터도 잘 알고 있었다. 

코드명 ‘체로키’는 당연 미국의 국익을 위해 존재했다. 밴스는 1979년 2월 주한 미대사관에 보낸 비밀전문에서 미국의 국익을 이렇게 정의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함으로써 ‘지속 성장하고 있는 한국과의 경제관계를 통해 최대한의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 그리고 ‘자유, 민주적 정치과정의 발전을 통해 인권환경 개선’을 도모하는 것. 


예상치 못한 10·26에도 이러한 미국의 전략적 목표가 변경·수정된 적은 없다. 하지만 당시 호메이니가 이끈 이란혁명으로 카터 정부가 수세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또 하나의 이란’은 안된다는 것이 미 행정부 및 의회의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물론 겉으로야 ‘인권외교’를 표방했지만 1980년 대선을 앞두고 표가 아쉬웠던 카터 정부로서 또 한번의 외교적 실패는 무조건 피해야 할 일이었다.

제주 4·3이 동서냉전의 희생양이라고 한다면, 광주 5·18은 동서 신냉전의 제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체로키 파일 속 극비문서를 보면,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 홀브룩과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과 같은 ‘강경파’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와 관련, 당시 미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였던 팻 데리언의 증언에 따르면, 카터 행정부 말기 ‘국가안보 히스테리’가 대통령을 비롯해 행정부를 장악하고 있었고, 광주에 대한 미국의 결정도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광주 관련 미국의 개입의혹은 5월22일 오후 4시(한국시간 5월21일 오전 7시) 백악관 상황실에서 열린 ‘정책검토회의’ 회의록을 보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된다. 참석자는 국무부, 백악관, 국방부, CIA, 합참, NSC 등의 최고위 관계자들이었다. 결론은 ‘필요한 최소한의 무력 사용’을 통한 광주에서의 질서회복이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 이를 ‘단기적으로 지지, 장기적으로 정치발전 압력’이라고 요약했다. 또 회의에서는 광주 외부로 상황이 확산될 때를 대비해 필리핀 북방에 위치한 미항모 시코럴호의 방향 변경을 ‘일본해’ 쪽으로 지시한다. 시코럴이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고립된 자신들을 구출하러 왔다는 생각에 도청 지도부는 환호했다지 않는가.


체로키는 백인이 학살한 미원주민 부족이다. 그 이름을 딴 코드명 ‘체로키’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 미국의 한국에 대한 개입의 기록이다. 200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잘못된 정책’인 광주개입에 대해 이제 미국이 사과해야 한다.